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안녕하세요

by 월급쟁이 경제학 2025. 2. 7.

최무선은 고려 충숙왕 12년(1325년) 영주(영주, 지금의 경상북도 영천)에서 광흥창사 최동순의 아들로 태어났다.그는 일찍부터 기술에 밝고 방략이 많았으며, 병법(兵法) 논하기를 좋아하였다. 또한 그는 어려서부터 화약 무기에 관심을 가져 각 분야의 책을 널리 상고하였고, 중국어에도 뛰어났다. 문하부사의 벼슬까지 지낸 그는 당시 한창 기승을 부리던 왜구의 노략질을 대응하기 위해서는 화약과 총포만한 것이 없다며 화약 제조에 관심을 가졌고, 왜구를 무찌르는 데는 화약을 사용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에 일찍부터 화약 제조법 연구에 몰두하였다. 화약과 화포(火砲) 제조에서 유황, 숯과 함께 꼭 필요한 염초는 화약의 본고장인 중국에서 수입해 와야 했는데, 당시 원, 명 왕조에서는 화약의 제조 방법(재료의 배합 비율 등)을 비밀에 부쳤기 때문에 당시까지만 해도 한반도에는 이 기술을 아는 인물이 없었다. 가까스로 최무선은 원의 강남 이원(李元)을 통해 화약 제조에 관한 몇 가지 비법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집에서 부리던 종 몇 명에게 그 기술을 배우게 해서 효과를 시험해 보고 난 뒤 최무선은 도당에 자신이 화약을 만들었다며 시험해볼 것을 건의하였지만, 도당에서는 최무선의 말을 믿지 않았을 뿐 아니라, 최무선을 사기꾼이라 부르는 자도 있었다. 몇 년에 걸쳐 끈질기게 건의한 끝에야 우왕 3년(1377년) 10월, 성의를 인정받아 화통도감(화약국)이 처음으로 설치되었다. 화통도감의 제조로서 최무선은 대장군포 · 이장군포 · 삼장군포 · 육화(六花) · 석포(石砲) · 화포(火砲) · 신포(信砲) · 화전(火箭) · 화포(火砲) · 화통(火㷁) 등의 총포류를 개발하고, 화전(火箭) · 철령전(鐵翎箭) · 피령전(皮翎箭) 등의 발사용 화기, 기타 질려포(疾藜砲) · 철탄자(鐵彈子) · 천산오룡전(穿山五龍箭) · 유화(流火) · 주화(走火) · 촉천화(觸天火) 등 각종 화기를 제조하였다. 아울러 이러한 함포를 실을 수 있도록 전함 개량에도 힘을 쏟았다. 또한 화기 이용에 대한 교육에도 힘써 화기발사의 전문부대로 보이는 화통방사군(火筒放射軍)이 편성되었다. 동왕 6년(1380년) 왜구 선단 5백 척이 진포(鎭浦)에 출몰, 서천(舒川)과 금강(錦江) 어구까지 올라와 주변 지역에 대한 방화와 약탈을 자행하자, 최무선은 부원수(副元首)로 임명되어 도원수(都元首) 심덕부(沈德符), 상원수(上元首) 나세(羅世)와 함께 전함을 이끌고 배편으로 출항, 처음으로 화통 · 화포 등을 사용하여 왜선을 격파했다. 이때 그는 부원수로 군사를 분편할 때 최칠석(崔七夕) 등을 이끌고 진포에서 고려군을 지휘하였다. 이때 진포에 침입한 왜구의 배 500척을 모두 불살라버렸다. 타고 온 배를 잃어 퇴각로가 막힌 왜구는 곧 한반도 내륙을 돌며 무자비한 약탈을 일삼았지만, 전라도와 경상도를 거쳐 운봉에 집결한 왜구는 다시 병마도원수 이성계(李成桂) 등이 이끄는 고려군에게 황산에서 궤멸되어 그 세력이 전에 비해 크게 꺾였다(황산대첩). 《태조실록》에 실린 졸기에서 사관은 "이로써 왜구가 차츰 줄고 항복하는 자들이 서로 잇따르며, 바닷가 백성이 생업을 회복하게 되었으니, 이는 태조의 덕이 하늘에 응한 덕분이라 하나 무선의 공 또한 적지 않았음이다."라고 최무선의 공적을 평가하고 있다. 동왕 9년(1383년) 왜구가 다시 남해의 관음포(觀音浦)에 상륙하자 최무선은 부원수로 출정하였고, 이 전투에서도 화기를 써서 왜선을 격침시키는 공을 세운다. 이후 왜구의 침입이 대폭 줄어들었을 정도로 화약 병기의 사용은 왜구 격퇴에 크게 기여하였다. 두 번의 해전 승리로 자신감을 얻은 고려 조정은 창왕(昌王) 1년(1389년)에는 왜구의 본거지로 알려진 대마도를 정벌하였는데 최무선 또한 출정해 포로로 끌려간 백여 명의 고려인을 구출하기도 했다. 그러나 우왕 14년(1388년) 이성계(李成桂) 등 신흥 무인 세력이 주도한 위화도 회군으로 우왕이 폐위되고, 이듬해인 창왕 1년(1389년) 조준(趙浚) 등의 주장으로 화통도감은 혁파, 군기시(軍器寺)에 통합되었다. 이는 왜구의 침입이 줄어들어 더 이상 무기 제조가 필요없다는 이유에서였지만 실은 화약 무기의 보급으로 자신들의 지위가 위협받을까 걱정한 때문이었다.